설기문 칼럼

영화 에프터 라이프를 추천합니다.

설기문 2010. 9. 1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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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오랜 화두,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

모든 사람이 죽고나서 자신이 죽은 걸 받아들이지 않고 삶에 대한 미련을 가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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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일을 더 두려워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은 숨만 쉬고 있을 뿐, 이미 죽음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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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살아 남은 자의 몫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는 이 영화 속에서 고통은 모든 존재의 몫은 아닐까 싶었다.

삶에서 깊은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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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는 삶에 대한 갈망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다시금 삶에의 열망을 갖는다고 한다.

아이러니다....

 

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우리나라의 시골 왠만한 곳이면 어디서나 산을 볼 수 있듯이 나의 고향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때로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어느새 별로 높지 않는 동네 야산의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되곤 했다.
지금이야 별로 높지 않게 보이는 그 산들도 어린 시절에는 제법 높게 보였다.
산 위에 올라서면 늘 자연스럽게 저 멀리 더 크고 많은 산들이 보였다.
아주 멀리 커다랗게 보이는 저 산은 어떤 산이며 저 산 너머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껏 상상하면서 호기심을 불태울 수 있었다.
 

산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땅에서보다 좀 더 가까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그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하늘의 끝은 어디이며 그 끝에는 무엇이 있으며
또 그 너머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를 궁금해 했었다. 이처럼 어릴 때는 모든 것이 궁금하였고
또 모든 것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졌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나 혼자 만의 경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나 어릴 때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릴 때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궁금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날까, 아니면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의 삶이 존재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얻기 어렵다.
비록 여러 종교에서는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지만 그것 역시 각 종교마다 서로 차이가 있기에
어떤 것이 옳을지에 대해서 또 궁금하지긴 마찬가지다.
결국 각자가 믿는 종교적 믿음이나 개인의 생각에 따라
우리는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 서로 다른 미래관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최근에 모처럼 괜찮은 영화들을 보았다.
 ‘인셉션’과 ‘after life’라는 미국 영화였는데
특별히 ‘after life’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였는데
어쩌면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고도 좋을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겠지만 나로서는 아주 의미 깊게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최면치료 및 심리치료 현장에서의 전생 퇴행과 크게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생 퇴행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빙의치료 전문가였던
dr. 볼드윈의 빙의 치료적 작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삶의 가치는 무한하지만 그것도 개인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어떤 눈과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극과 극으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후의 삶의 존재, 영혼의 존재 등에 대한 개인의 믿음에 따라서도
삶의 문제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주제 자체가 죽음 이후의 삶을 다루지만
결국은 살아있는 현재의 삶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애나라는 여자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눈을 떴지만 자신이 시체실에 누워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장례 절차를 준비하는 장의사 엘리엇은
단지 무덤에 묻히기 전 3일 간 영혼이 떠도는 것일 뿐이라며 이제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고 한다.
이 장면들을 보면 장의사는 마치 나와 같은 카운슬러이며
애나는 내가 상담하는 내담자와 같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비록 영화에서는 죽은 영혼을 대상으로 장의사가 이야기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것 또한 상담의 과정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장면들에 기초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을 해본다면 그 상담은 일반적인 상담이 아니라
오히려 최면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전생퇴행에서의 영혼 상태
또는 빙의치료에서의 영적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흔히 최면을 통한 전생치료를 할 때 우리는 내담자에게 전생에서의 죽음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그 죽음 이후의 영혼 상태로 가보도록 유도를 한다.
이때 많은 내담자들은 죽음 후의 영혼 상태를 떠올리고
그 영혼이 어떠한 경험을 하는지에 대해서 회상하곤 한다.
 

물론 빙의치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빙의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에너지의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 부착되거나 그에게 침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영혼의 기억이나 상태에 영향을 받거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깊이 이완된 최면 상태에서 자신의 죽기 전,
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곤 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전생에서의 죽음 후의 영혼 상태에서 전해주는 이야기나
빙의된 존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영화의 내용과 비슷하게 연결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교통사고로 죽은 애나의 약혼자 폴은 죽은 애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찾아가지만,
장의사의 강한 반대로 결국 그녀를 보지 못한다. 비밀스런 장의사에 대한 의문이 깊어지는 가운데,
애나를 목격했다는 아이가 나타나고 폴도 그녀에게서 걸려온 듯한 전화를 받는 등
주변에서 점점 미스터리한 일들이 발생하면서 영화의 흥미는 더 해간다.
반전을 기대하는 심리를 높여가면서 영화는 점점 더 관객이 몰입하게 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많은 관객들은 과연 여자 주인공인 애나가 정말 죽었을까,
아니면 살았을까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의 주된 메시지는 주인공이 살았느냐 죽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 이후의 영혼 상태나 영혼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영혼의 경험들을 볼 때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또 의미있게 잘 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결국은 삶에 대한 자기성찰을 유도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영화를 만든이의 의도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이 영화는 또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나름대로의 특별한 형태의 영혼의 삶이 있으며
현재의 삶을 돌아보고 때로는 후회도 하고 미련도 갖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잘 해야 하며 ‘잘 살아야 한다’는 너무도 평범한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한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고,
자연에 있어서 영적 상태나 영혼의 존재가 결코 허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영적 경험은 오히려 우리의 삶의 질과 직접 관련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생치료와 빙의치료의 관련성과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문제나 사후 세계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이 영화를 한 번 쯤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