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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빨간마후라'의 오리지널 포스터 (이미지 출처=영상자료원)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이것은 내가 어릴 때 즐겨부르던 ‘빨간마후라’라는 노래의 가사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이 노래가 크게 유행했기도 했지만 나는 워낙 이 노래를 좋아했기에 어른들이 노래를 시키면 의례히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이 노래는 1964년에 개봉된, 같은 제목의 영화 ‘빨간마후라’의 주제가이기도 하면서 하늘을 지키는 공군 아저씨의 사나이다운 기개를 담은 내용 때문에 나 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의 애창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공교롭게도 군 생활을 공군에서 하였다. 비록 방위병이었지만 특히 대구의 전투비행단 소속으로 근무하면서 수없이 뜨고 나르는 전투기를 보았고 여러 명의 조종사 장교들을 모시기도 했는데, 바로 그 시절에도 빨간마후라를 여전히 나의 애창곡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영화 빨간마후라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배우가 곧 신영균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영화의 핵심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신영균, 그는 우리의 어린 시절에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불의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면서도 의리있는 멋진 남성의 모습을 연기했던 대표적인 배우였다. 그래서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스타중의 스타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별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빨간마후라에 얽힌 유래와 관련한 사연을 들어보면 빨간마후라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게 와닿는다. 그 유래라는 것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우리나라 공군의 상징인 빨간마후라 그 자체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빨간마후라 영화에 대한 것이다. 먼저, 막연하게 공군의 상징으로 알고 있는 빨간마후라는 우리나라에서만 그렇다고 한다. 즉 다른 나라 공군에서는 빨간마후라가 없는데 우리나라 공군, 특히 조종사들이 빨간마후라를 두른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김영환 장군(1921∼1954)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공군 창설의 산파역을 맡은 분으로 공군 초대 참모 총장인 김정렬 장군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6.25때 첫 한국인 전투조종사로서 해인사폭격 거부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실제로 해인사에는 그의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일체의 권위나 허세 따위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어느날 비행복에 머플러가 없어 허전하던 참에 형수에게 머플러로 목에 두를 것이 하나 달라고 하였는데, 그때 형수는 마침 시동생에게 줄 만한 천이 없어 치마를 만들어 입으려고 끊어 놨던 빨간 천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때 김장군은 그것을 적당한 크기로 찢어 목에 둘렀는데, 그것이 곧 빨간마후라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로 영화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빨간마후라는 실존 인물이었던 유치곤 장군(1927~1965)을 모델로 한 영화라고 한다. 유장군은 경북 달성군에서 출생하여 일본에서 비행교육을 받은 후에 6.25가 한창이던 1951년 4월에 공군소위로 임관되어 10월에 첫 출격을 시작한 이래로 1953년 5월30일 우리나라공군 최초로 적진 출격 200회 기록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도 각종 전공을 세웠기에 우리나라와 미국 정부로부터 각종의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공군의 다양한 보직을 맡으면서 국가방위에 힘쓰다가 1965년 1월 1일 비행사고로 순직하였는데 그의 생전의 전공으로 인해 공군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실제로 영화는 주인공인 나관중 대위를 중심으로 하늘에 보람을 걸고 사는 공군 조종사들의 사랑과 전우애와 조국애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크게 히트하여 여러개의 국제영화상을 수상하였고 세계 64개국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깊은 빨간마후라의 또 다른 주인공 신영균씨가 며칠전 어제 11월 5일에 5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였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이날 그 영화가 처음으로 개봉되었던 서울 중구 명보극장에서 가족, 영화인들과 함께 명보극장과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사재 기부와 관련하여 영화인으로서의 삶과 기부 배경, 부자가 된 과정 등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잔잔한 감동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해외에서 전해져 오는 유명인사들의 기부 사례를 많이 접해왔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거액기부의 사례를 많기 힘들었다. 그것도 아무런 조건없이 이루어지는 기부는 더욱 말이다. 하지만 한때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스타가 80이 넘어 인생을 정리할 시점에서 가족 전체의 지지를 받으면서 거액을 기부했다는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실 나의 것을 남에게 선뜻 내어놓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난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았던 경험 때문에 나의 것에 대해서 유난히 애착을 갖고 있는 편이다. 그렇기에 작은 것이라도 기부하는 것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나 경외심은 유난히 크다. 그래서 비록 아직은 나 자신이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 기부행위에 대해서 이번 기회에 스스로 반성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기부의 정신을 실천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남자로서 참 좋아했던 아저씨 신영균, 그가 벌써 80이 넘은 나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신영균이란 이름을 접할 때면 항상 떠오르는 것이 영화 빨간마후라이지만 동시에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함께 그려지는 상황에서 새삼 세월의 무상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 혼자만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시점에서 어쩌면 더 큰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대스타 신영균이 그렇게 자신의 많은 재산을 사회를 위해서 내어놓았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나 그의 가족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새로운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고 살만한 사회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괜히 그와 가족에게 감사하고 싶고 그와 그의 가족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쪼록 그의 진정한 뜻이 잘 반영되어 그 재산이 정말로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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