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문 칼럼

살아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

설기문 2010. 4. 22. 16:18

 

 

 

 한 아이가 여느 때와는 달리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오지를 않았다.
부모는 제시각에 귀가하지 않는 아이에게 화가 나 있었다.
집에 오기만 하면 야단을 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참이나 지나도 아이는 귀가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부모의 화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정말로 크게 혼을 내 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는 자정이 되어도 연락도 없었다.
그때서야 부모는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그리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에 틀림없이 아이에게 사고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리 저리로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날 때 쯤,
혹시 아이가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을 하면서 살아있기만 해다오...
라는 염원을 갖게 되며 비록 아이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해도
우리는 그 아이의 안전한 귀가에 대해 반가움과 감사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위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흔히 사고도 생길 수 있고 또 예고 없는 불상사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일관성이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변성도 있다.
성격은 마음의 일관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얌전한 사람은 어디가나 얌전하며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농담을 잘 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 일관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모처럼 오래전 잊고 있었던 초 중고교시절의 동창생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한순간 그 일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잘 못 알아볼지 모르나 10분 정도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과거의 그 성격이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하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변성도 있다.
모처럼 만난 친구에게서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나 성격을 볼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때 우리는 또한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 마음의 이런 일관성과 가변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나타나는 성격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근 1개월동안 우리나라의 최대 현안인 천암함 사고의 경우에서도
그러한 일관성과 가변성을 보게 된다.
천암함 사고와 관련하여 며칠 전에 보도된 한 뉴스의 제목은
“시신 찾았다고 축하받다니…이런 기막힌 일이 있습니까”였다.
천암함 실종자 가족들이 살아있는 사가족의 흔적이 아니고
이미 사망한 가족의 몸을 찾았다고 한다면 분명히 불행한 일일 것인데,
그것이 축하받을 일이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희생자 가족들은 처음에 사고가 나고 실종사실이 알려졌을 때
사랑하는 가족들이 여전히 살아있을 것으로 믿거나 기대하고
한 사람이라도 빨리 구조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물론 정부나 전 국민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들을 구조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조금씩 상황이 바뀌어져 갔다.
그래서 결국에는 실종자 구조와 수색작업을 중단해도 좋다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 여건상 살아있을 가능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구조과정에서 더 큰 희생이
따르는 것을 우려한 가족들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했을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는 모든 최악의 경우를 다 받아들이면서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시신이라도 찾기를 원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바로 그들이 시신이라도 인양한 희생자 가족들에게 피맺힌 절규로 던진 말이
바로 “시신이라도 찾았으니 축하드린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문득 음성 꽃동네가 생각난다.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노인, 부랑자, 알콜중독자들을 수용하여
돌보기 위하여 1976년에 설립된 사회복지시설인 음성꽃동네는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표어로 유명하다.
최귀동 할아버지와 오웅진 신부와의 만남으로 시작된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그 표어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작은 것에도 감사해야 함을 일깨운다.

시신이라도 찾고 싶은 천안함 실종자의 가족을 생각하고 또,
꽃동네의 표어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스스로에게 불평하는 생활 속의 자잘한 불만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긴 겨울을 지나고 이제사 유난히 빛나게 피어나는 봄꽃들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되풀이되는 우리의 일상과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