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문 칼럼

무한 마음세상과 무한 몸의 세상

설기문 2010. 4. 17. 12:51



이제 4월의 한 가운데,  진달래, 개나리, 벚꽃, 목련과 같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다.

먼저 피어나 꽃잎을 떨구고 있는 꽃들도 있고,

또 새롭게 개화를 서두르는 꽃들이 함께 하는 봄, 사월이다.

여느 봄 같지 않게 이 봄은 힘겹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일부 지방에선 꽃잎위로 눈까지 흩뿌릴 지경이었으니 철 따라 피어 난

꽃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면서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다’라는

말이 더욱 실감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과,

매서운 겨울 눈바람을 이기고 제 철이 돌아오면 지난 해 그 자리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잊고 있었던 존재감을 알려주는 생명의 존재!

해마다 그 자리에 같은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그것을 우리는 자연의 섭리라고 부른다.

오늘도 눈부시도록 밝게, 빛나게 피어있는 하얀 목련꽃을 보면서

‘오 내사랑 목련화야’ 라는 가곡을 떠올리게 되고

소박한 시골여인의 수줍어하는 뺨을 연상하게 하는 분홍빛의 진달래를 보면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는 구절을 떠 올리게 됨도 감사한 일이다.

왜냐하면 칼날같이 매서운 겨울을 보내어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 온다는 사실과

그러한 자연의 섭리에서 우리는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순환하는 우주의 질서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둡고 깊은 겨울 속에서도 우리는 분홍빛 화사한 봄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길게 느껴질수록

새롭게 맞이하는 봄은 더욱 반갑고 고맙게 느껴지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처럼 우리의 몸에도 ‘몸의 섭리’가 있는 듯하다.

어제 아침 우연히 접한 인터넷 뉴스를 접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보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우표 뒷면에 묻은 침을 분석해 냄으로써

2차 대전에 참여했던 미국의 수병이 68년 만에 신원이 확인되었다는 것이었다.

즉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우표 뒷면에 묻힌 침이 단서가 되어서

DNA 감식이라는 과학적 조사를 통한 끝에 드디어 신원이 파악되었다고 한다.

이 기사를 통해 과학의 놀라운 힘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지만

몸의 신비함과 섭리에도 관심이 저절로 갔다.


DNA라고 하면 우리 육안으로 전혀 보이지 않는 초극미의 물질이다.

우리 몸의 아주 작은 한 부분밖에 되지 않는 그 DNA속에는 우리 몸의

주인에 관한 각종 신체적 정보가 모두 다 담겨 있다고 하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이것이 바로 몸과 신체의 섭리이자 신비함이다.

그것도 근 70년 전의 우표에 묻어있었던 타액의 흔적에서 DNA가 검출되었으며

그것에 바탕 하여 이미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한 사람의

신원이 파악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인간도 자연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볼 때에 이 뉴스를 접하면서

자연의 위대한 섭리와 신비함을 느끼고 깨닫게 된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인간에게는 몸과 함께 마음도 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세계는 몸의 세계만큼 알려져 있지 않거나

연구가 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마음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관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여 연구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심리학이라는 것도 실험과 통계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가는 학문이기에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흘러가는 마음의 세계, 각 개인마다 자신의 정서에 기인하여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것에 대한 연구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제각각이기도 하고 자기의 마음을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마음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마치 구름 잡는 것 같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옛말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는데,

여기서 한 길 사람 속은 결국 사람의 마음속을 말한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볼 때 차라리 구름을 잡는 것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잡는 것보다 차라리 쉬워 보인다.

왜냐하면 구름은 그래도 물질인데, 마음은 물질이 아닌 비물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의식의 마음과 무의식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무의식의 마음은 의식의 마음이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삶의 전체 경험이나 기억을 담고 있다.

흔히 인간은 한 순간에 200만 비트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접하지만

실제로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것은

그 중에서 134비트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매순간 우리에게 입력되는 정보들 중에서 무려 15,000분의 1에 해당하는

정도 밖에는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정도인가?

그렇다면 그 외의 정보들은 어디로 갈까?

아마도 무의식에 입력되어 저장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용량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인식하는 의식의 마음 세계는 작고도 보잘 것 없는 것에 해당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DNA는 전체 인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비율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신체는 DNA에 비해서 천문학적인 배율로 더 크고 범위가 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의 DNA로 전체 인체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다고 한다면 마음의 경우에

한 개의 정보로 과연 15000배가 되는 무의식의 마음을 포함한 전체 마음을 과연 알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식의 마음만으로는 전체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무의식을 알아내는 방법으로는 최면기법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물론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자유연상법이라는 것을 통하여 무의식에 접근했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최면의 기초적인 방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최면을 공부했던 프로이트로서는 최면에서 사용했던 무의식 접근의 원리를

자유연상의 기법으로 정립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무의식속에는 자기 자신에 관한 각종의 정보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속에는 겉으로 드러내놓을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억들을

억압한 것도 있겠지만 그 보다도 더 중요하게는 잠재능력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을 앎으로써

스스로 더 크게 개발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찾아내고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우표를 붙일 때 사용했던 타액의 흔적으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전사한 병사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오늘날의 과학기술의 능력을 접하면서

무의식의 마음도 확실하게 찾아낼 수 있는

과학기술은 언제 개발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면과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기계적인 방법으로 무의식의 내면세계를 다 볼 수 있는 세상이 과연 올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온다면 그 세상은 과연 행복한 세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서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을 해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