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로저스가 성장원리를 제안했을 때 그는 성장 과정을 야기하는 치료적 분위기에 대해서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그는 “자연주의자의 관찰적·기술적 접근을 취하기 위하여 현상에 대하여 최대한 선입견없이 접근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수단으로서 사용하였다” (Rogers, 1961)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에릭슨이 취했던 자세와 똑같다.
밀턴 에릭슨도 그의 최면 연구에 있어서 자신을 “도구로서” 사용하였는데,
예를 들면 자기최면을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관찰하고 숙고하였으며
이완, 무게감, 피로감, 해리 등과 같은 것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법을 배워나가느라
젊은 나이에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Rossi, 1980);
그는 자신의 빼어난 관찰 및 내성(內省) 능력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에릭슨이 최면실험을 하느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간’을 보냈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나에게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는 생애 두 번에 걸친 소아마비와의 싸움뿐만 아니라 난독증, 부정맥(不整脈), 색맹, 음치와 같은 장애 때문에
아주 다른 세상을 살았다. 또한 그가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하여
인간의 독특성과 차이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갈 때 내적 인생 역정은 흥분으로 가득찼다.
에릭슨은 어린 시절에 감자를 적절한 시기에 파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심었는데도
자신의 감자가 다른 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잘 자랐다는 사실을 할아버지께서 믿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셨을 때
마음으로 상처를 입었었다. 그때 그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평생의 전문적인 삶 속에서 부닥칠 인간의 경직성과
맹목성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고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삶의 교훈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는 ‘통찰의 눈부신 빛’(blinding-light-of- insight)을 경험하였다.
에릭슨은 난독증의 문제 때문에 m자와 3자를 구별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손으로 글자를 따라 쓰게 함으로써 두 개 글자를 구별해주기 위해 노력했을 때,
그는 순간적으로 순수한 지각적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섬광으로 인해 갑자기 m과 3의 차이가 눈에 보였던 것이었다.
m자는 다리 위에 서있는 모양으로 있으며 3자는 다리가 옆으로 뻗어있는 모습이었다
(Erickson & Rossi, 1980, Vol.1, p.109). 이 현상은 게슈탈트의 통찰과 다를 바가 없다.
에릭슨은 이와 비슷한 통찰의 섬광을 고등학교 시절에 순간적으로 경험하였는데
그때 그는 정부를 의미하는 government란 단어 발음법을 배우고 있었다.
담당 선생님이었던 미혼의 여성인 월쉬 선생님은 이 단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단어를 가장 작은 의미 단위로 쪼개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만한 사람이다.
월쉬 선생님은 에릭슨에게 학급의 동료인 라번 (La Verne)이라는 학생의 이름을 이용하여
government란 단어를 발음하도록 가르쳤다. 선생님은 그에게 단어 앞에 gov글자를 삽입하고
친구이름인 라번 뒤에 ment를 붙이게 하여 gov-La Vernement를 발음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라번의 라(La)자를 생략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 순간, 그에게는 학습의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사물을 ‘유목화’(chungking)하는 예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단기치료와 신경-언어프로그래밍 즉 NLP 분야에서 발달된 것이기도 하다
(Bandler & Grinder, 1979, 1982; Grinder & Bandler, 1981).
만일 우리가 강렬한 빛 또는 시각적 환각과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되면
주변의 다른 현실이나 현상들에 대한 모든 인식이 차단되어 그러한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데,
에릭슨은 이러한 것은 곧 자연발생적인 자기최면 상태의 한 증거가 된다고 후에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때때로 ‘변화된 상태’와 의미있는 학습간에는 확실한 관련성이 있는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고 하였는데
그의 말은 근원적으로 상담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그리고 진실로 창의적인 노력을 위해서도 근원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릭슨이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자기최면적 현상은 그의 평생에 걸친 최면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였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가 위스콘신대학교 학부생 시절에 경험했던 또 다른 경험 한 가지는
여기서 언급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로날드 헤이븐스(Ronald Havens, 1985)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에릭슨이 2학년을 마칠 즈음에 유명한 미국심리학자인 클라크 헐(Clark L. Hull)이 시행했던 최면 시범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이 에릭슨의 뛰어난 전문가로서의 경력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 같다.
그는 헐의 시범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몹시 흥분되어 2학년을 마친 후 여름방학동안에
그에게 협조해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면을 거는 실험을 하였다.
방학이 끝난 3학년 가을 학기 동안에 에릭슨은
자신의 방학동안의 실험 결과와 결론을 헐이 가르치는 최면 세미나에 발표하였다.
에릭슨의 경험과 결론은 헐의 견해와 달랐고 그래서 둘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다.
최면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견해를 취했던 헐의 결론은 객관적이고 실험적이며 표준적인 접근에 바탕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릭슨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각 개인의 독특성,
주관적 세계의 풍요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기에 사람은 누구나 존중되어야 하며 동시에
과학 실험실의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 존재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은 나에게 있어서 에릭슨의 기본적인 용기와 통합성으로 보여진다.
로저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기존의 권위와 제도권에게 감히 의문을 제기하였고
인간에 대해서 존중의 태도로 다루어져야 하는 독특한 개인으로 봐야 한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헐과의 이러한 견해의 차이로 인해 에릭슨은 최면 연구와 저술에 대한 흥미를 더 크게 갖게 되었다.
“그와 로저스는 자신, 타인들, 그리고 서로 다른 세계관의 상대성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Gunnison, 1985).
우리 또한 자신, 타인들, 그리고 서로 다른 세계관의 상대성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일, 관계, 꿈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설기문 역 " Hypnocouseling" 중에서
위 글은 설기문교수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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