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례

싸이코드라마로 푼 엄마와 딸의 갈등

설기문 2009. 5. 20. 07:40

엄마와 딸의 관계는 그 어떤 인간관계 보다 밀착되고 유대가 강한 것이 보통이다.

딸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의 정서를 물려 받아 많은 부분 엄마처럼 살아가게 된다.

대부분의 딸들은 어린 시절 기억 속에 간직된 엄마를 떠 올리고

사랑과 동정, 연민을 갖는 동시에 서운함이나 원망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다음은 심리 상담을 받고 싶다고 상담실로 찾아온 어느 모녀간의 이야기이다.

딸의 이야기는 이렇다.

성격이 활달하고 야망이 컸던 아버지는 자신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그것도 이웃 동네에, 아버지의 사업체와 가까운 곳에서 좋은 집을 얻어서 말이다.

그러한 아버지는 부인과 딸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엄마와 딸은 함께 외톨이가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천성이 여리고 소극적이었기에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해 본 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으며 그때부터 모녀는 극심한 생활고는 물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심정으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무능한 엄마는 이혼할 때 남편이 준 작은 돈을 아껴 쓰며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중의 돈은 바닥이 나고 모녀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학비가 필요할 때면

그녀는 혼자 아버지를 찾아가서 겨우 얼마간의 돈을 얻어서 공부를 계속 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녀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아버지에게는 새 부인에게서 얻은

두 자녀가 있었으며 그 새 부인은 자신의 엄마보다 훨씬 더 지적이고 유능하고 멋진 사람처럼 보였다.

왠지 아버지와 뜻이 너무 잘 맞아 보이는 새 부인은 아버지 몰래 그녀에게 가끔씩 용돈을 주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과 엄마가 너무나 비굴한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혼자 처참한 마음으로 울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능하고 착한 그녀의 엄마는 동네 식당에서 부엌일을 거들며 겨우 겨우 생활을 연명해 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착하고 순하던 엄마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엄마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며

그때 부터 점점 더 세상에 대해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술에 취한 엄마는 늘 아버지를 욕하면서 동시에 딸을 욕했다. 즉 딸이 아버지를 닮아 인정머리가 없고,

자신의 삶이 딸 때문에 더욱 힘들어졌다고 말이다.

 

다행히 공부에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가정형편은 어려웠지만 명문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론 학비를 충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여서 눈치를 보면서 아버지를 찾곤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녀에게 늘 냉정한 눈빛을 주던 아버지가 명문대학에 입학한 딸을 보면서 점차로 마음이 바뀌어

넉넉한 용돈과 학비를 기꺼이 조달해 주었다. 이를 눈치 챈 엄마는 딸을 배신자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부턴가 왠지 아빠의 새 부인 즉 새 엄마가 싫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엄마보다 당당하고, 왠지 기품이 있어 보이는 새엄마가 차라리 자신의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사춘기엔 많이 했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깊어진 모녀간의 갈등은 그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기 시작하면서 더 악화되어갔다.

딸이 된 그녀의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무능한 엄마는 졸업을 하고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길에 늘 걸림돌이 되었다.

딸이 돈을 잘 번다는 것을 안 엄마는 자신의 인생이 망가진 모든 책임을 딸에게 떠 넘기면서

술을 마시고 책임을 지라며 울부짖곤 하였다.

 

성실하고 착한 그녀의 남편은 혼자 있는 장모가 안타까워서 함께 모시고 살자고 제안하지만

정작 딸인 그녀는 엄마가 지긋지긋하게 싫다고 하면서 남편의 뜻을 거부하였다.

딸의 눈에 비친 엄마는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무절제 해 보이고.....’

그래서 자신이 엄마의 딸이라는 운명이 싫다고 하였다.

그래서 엄마가 홀로 계심이 안타깝긴 하지만 함께 살고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차라리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이라도 시작했으면 좋겠건만

엄마는 어떤 일에도 관심과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에 더욱 못마땅하게 보였다.

 

우리 상담실에서는 흔히 본 상담을 하기 전에 1~2시간정도의 사전상담 시간을 갖는다.

이상의 이야기는 내담자인 딸이 한없이 펑펑 울면서 쏟아낸 이야기다. 사전상담을 마칠 때쯤

그녀에게 엄마랑 같이 상담을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다.

왜냐하면 엄마 역시 삶에 대한 깊은 아픔이 있으며, 그것을 근원적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동의를 하였고 이에 따라 본 상담예약을 잡았다.

그 후에 그녀는 엄마와 함께 상담실을 다시 찾아왔다.

 

그녀의 엄마는 언뜻 보기에도 삶을 포기한 듯 멍한 눈빛이었다.

엄마와 잠시 따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딸에 대한 괘씸한 마음과 배신감을 단숨에 토해냈다.

남편이 자신을 버리니, 자식도 자기를 헌신짝처럼 버렸으며 딸은 어버지를 닮아 인정머리가 없다고 하였다.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과 성장기 때 친정에서 겪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있었지만

결혼을 하면서 참 행복했는데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언제부턴가 남편은 그녀에게 ‘바보같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바보같은 자신을 아무리 어떻게 해 보려고 해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남편은 바람이 나서 집을 버리고 나갔다고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도 그녀가 남편간수를 제대로 못해 그런 일이 생겼다고 며느리를 나무랐다고 한다.

이런 저런 과정에서 그녀는 평생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아왔다고 한다.

결혼 하기 전에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온 식구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살아왔는데

자신을 버린 남편 역시 그녀의 착한 점이 좋다고 결혼하자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순종적인 아내를 남편은 조금씩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내가 답답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그래도 딸 하나를 바라보면서 살아야지 맘 먹었는데 세월이 가니 그 딸마저 남편과 똑 같은 성향을 보였고

그것에 더하여 엄마를 업신여기는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하고 딸이 미워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각자가 다 다르다.

어떤 일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도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엄마는 엄마대로의 해석으로 딸에게 실망하고,

딸은 딸대로의 방법으로 엄마의 인생관을 비판하고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본 상담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상담이 진행됨에 따라 모녀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어가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경우에 따라 심리치료에서는 사이코드라마 즉 심리극적인 방법을 곁들일 때

상대편의 입장을 가장 빨리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상담자는 심리극,

즉 사이코드라마의 기법을 적용해보기로 하였다. 역할 바꾸기를 시도하였다.

즉 엄마는 딸의 입장이 되고 딸은 엄마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이때는 물론 서로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다행스럽게 모녀는 각자의 연기를 충실히 했다.

엄마가 딸이 되고, 딸은 엄마가 되어 자기가 맡은 바 역할극에 열연을 했다.

 

여기서 길고 자세한 심리묘사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이러한 역할극을 통하여 상대편을 상대편의 입장에서 제대로 헤아리고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문제는 한순간에 그냥 해결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딸의 입장에서는 엄마가 왜 그렇게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으며, 저항할 수 없었는지,

왜 그리 딸에 대해 서운하고 서러운 마음을 가졌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입장에서도 딸이 왜 그렇게 엄마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아 했으며,

무능한 엄마를 바라볼 때의 마음 아픔과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얼마나 깊이 좌절하고

갈등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순간순간 그리운 아버지의 정에 목말라한 가슴 아픈 순간들에 대해

엄마는 딸의 마음으로 공감하게 된 기적 같은 순간이 온 것이다.

 

지켜보는 상담자도 울컥 하는 마음을 느끼는 가운데 엄마와 딸은 함께 긴 시간동안을 울었다.

딸은 비로소 말없이 혼자 삼키고 살아 온 엄마의 삶 속에서 술이 주는 위로를 이해하고,

엄마는 외로운 딸이 삶을 향해 달려온 고단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서로 가까이 앉게 된 모녀는 한참 동안을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20년이 넘는 세월이 갈라놓은 그 틈새들을 한순간에 메웠다.

이처럼 상담실에서는 가끔 때로는 자주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이 날도 다행스럽게 모녀에게는 기적과 같은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이제 서로를 편안하게 사랑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오래 오래 그들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