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문 칼럼

호주 시민들의 상처 기억하기

설기문 2008. 10. 23. 10:36

호주 시민들의 상처 기억하기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상처를 경험할 수 있다. 종류가 다르고 크기가 다를지라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상처 때문에 인생 전체를 포기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상처로 인해서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상처는 삶에 교훈이 되고 더 큰 성장과 발전을 위한 재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룩한 사람들은 어쩌면 상처를 전혀 입지 않았던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상처를 잘 견디고 극복할 뿐만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해서 더 큰 교훈을 얻고 더 큰 배움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호주에서 테드 제임스 박사가 진행하는 시간선치료 마스터트레이너 과정을 마치고 어제 밤에 귀국을 하였다. 호주에 있는 동안 몇 번에 걸쳐서 카페에 글을 올렸지만 그동안의 생각과 느낌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호주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자 한다.

 

내가 이번 호주 여행동안에 묵었던 곳은 시드니 교외의 작은 위성도시인 랜드윅(Randwick) 이라는 시에서였고 그곳에서 모두 56일간의 시간을 보냈다. 시드니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아는 호주 최대의 도시이면서

세계적인 미항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내가 있었던 곳은 시드니 시내로부터 버스로 20분 전후의 거리 정도만큼 떨어진 위성도시였다그런데 내가 묵은 랏지(Lodge)라고 하는 여관과 같은 숙소 옆에는 소위 쌈지공원에 해당하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이 공원은 전체 면적이 수백평 정도밖에 되어보이지 않는 작은 공원이다. 어쩌면 공원이 잘 발달된 서양적 환경으로 본다면 그것은 차라리 공원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쉼터로 보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작은 공원이었다.

 

아무튼 나는 며칠 동안 이 공원을 별 생각없이 지나다녔다. 그런데 그 공원 가운데에 작은 기념탑이 하나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나의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 기념탑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눈여겨볼 것 같지 않은 이 작은 기념탑을 호기심이 많은 나는 가까이 가서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 기념탑은

각종 외국의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탑이었다. 직사각형 형태로 네모난 기념탑의 각 4분면에는

이 지역 주민들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외국에서 전사한 호주의 군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을 적어놓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을 비롯하여 우리가 잘 모르는 전쟁에까지 참전한 호주군인들의 넋을 기리는 내용을 전쟁별로 각 4분면에 한 개 또는 두 개씩의 동판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이들 기록을 읽어가다가 마지막 4분면에 붙어있는 내용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깜짝놀랐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뜻밖에도 Korea란 다섯 글자를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알고 봤더니 6.25때 참전한 호주군인들을 추념하기 위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가 더욱 놀란 것은 그 기념탑이 결코 국가 차원에서 건립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아니라 이곳 주민들이 그들의 이름으로 설립하고 전사한 군인들을 추념한 것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나는 놀라움과 함께 아주 묘한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네의 상식이나 전통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위의 사진 속에 있는 동판 To The Glory Of God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줄에서 Korea란

               다섯 글자를 글자를 볼 수 있다. 아래의 사진은 기념탑 전체의 모습)

 

 

 

작은 도시의 지역주민들이 해외참전용사들을 기념하는 작은 기념탑을 동네의 작은 공원에

세웠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사실 역사란 것은 우리가 그것을 기억할 때

교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역사는 결코 지나간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의 관련성 속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이면서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로 유명한 Carr가 일찍이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말에서 대변해주었다. 건국의 역사가 짧은 호주의 주민들은 짧은 역사 속에서나마 끊임없는 과거와의 대화를 하고 있는 듯했고 그래서 사실 국가가 기념해야 할 것같은 일들 조차도 스스로 기념하고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묵은 여관으로부터 걸어서 20여분 정도 가면 아름다운 해변이 나온다. 멋진 해수욕장으로서 모래사장도

잘 발달한 이곳 모퉁이에는 역시나 작은 해변공원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기념비가 하나 있었다. 언젠가

해외에서 테러로 그곳에서 사망한 이곳 출신의 지역민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함 정도 크기의

작은 인물사진과 그들의 이름을 나란히 인쇄한 동판이 박혀 있는 그 기념비는 그때 사망한 사랑하는 이웃들을

기억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지역사회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아래 사진들은 추모공원이 있는 해변가의 풍경)

 

 

 

이웃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들은 기념탑이나 기념비라고 해서 결코 거창하게도, 또한 대단한 성지와 같이 꾸미지 않았다. 그냥 소박하게 산책하면서도 볼 수 있고 기념할 수 있도록 기념탑이나 기념비를 가까운 곳에 박하게 꾸며놓고 있었다. 특별한 날에만 기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늘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나는 호주에 머무는 며칠동안 그러한 예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그들의 생활이요 문화의 일부임을 알 수 있었다.

 

역사가 짧은 호주인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상처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상처를 잊지 않고

가까이서 늘 기억하려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상처를 기억함으로써 지역민들이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더욱 발전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상처를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좋은 교훈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우리들에게도 그런 면이 없진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주 긴 역사와 문화민족임을 자랑한다.

하지만 약소민족으로서 우리는 긴 역사동안 너무도 많고 큰 환란을 겪어왔다. 그래서 제대로 우리 것을 챙기고 지킬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전쟁과 외침으로 인해서 무수한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약탈되지 않았던가? 또한 우리들의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의 세대, 즉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에만 하더라도 우리는 먹고 살기에 바빠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삭막하고 거친 생활을 해왔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기억해야 할 것들을 많이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상처와 아픔을 기억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상처는 우리를 고통 속에 빠트리기도 하지만 우리를 성숙하게도

하기 때문이다. 아픔이 너무 커다면 우리가 그 아픔 속에서 무너질 수 있지만 아무리 큰 아픔이라도 우리가

그 아픔을 잘 극복한다면. 그리고 그 아픔이 우리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라면 그것은 우리 삶의 자양분이 되고 훌륭한 배움의 재료가 될 것이다.

 

가까운 호주 작은 도시의 동네 공원에 있는 기념탑들을 보면서, 상처를 그렇게 추념하는 지역민의 마음을 보면서 우리 또한 우리의 상처를 추념하고 기억함으로써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상처나 더 큰 아픔을 상처를 예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아닐까?

 

우리가 상처를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그래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삼는다면

그 상처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리라. 그것은 결국 NLP에서 말하는 관점바꾸기(reframing)의 예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각자가 갖고 있는 상처가 있다면, 그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더 좋은 교훈을 얻는

기회로 삼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