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 프로이트가 최면감수성이 높거나, 최면을 잘 활용할 수 있었다면 최면에의 역사는 엄청남 변화를 몰고 왔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였던 프로이트는
당시의 세계 최고의 최면전문가였던 프랑스의 신경생리학자 샤르꼬 (Jean Martin Charcot)로부터
최면을 배운 후에 최면연구 및 치료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 불리는 감정정화법의 치료적 가치,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병리학적 중요성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몇 가지 이유로 최면을 버리고 자신이 개발한 정신분석학을 위주로 하는 심리치료의 시대를 열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면서 유럽에서 최면은 빛을 잃게 되었다.
이처럼 심리치료의 역사에서는 프로이트가 선구자로 꼽히지만 최면의 역사에서는
오히려 프로이트에 의해 최면은 쇠퇴기를 걸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프로이트가 최면을 그만 둔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지적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그가 최면에 능숙하지 못했거나
최면으로써 치료적 효과를 크게 보지 못했다는 점들이 공통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어쨌든 그는 최면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었고 대신에 무의식의 원리에 기초하여 정신분석학을 개발하였다.
이후 정신분석학은 이후 서양 심리학과 정신의학 분야에서 새로운 심리치료 시대를 열어가는 혁명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고 대중적으로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최면은 학문적인 연구 대상으로는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 예로서 최면이 전문 심리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심리학자인 헐과 힐가드였다.
먼저 헐은 미국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였는데 1930년대 초에 최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10년간 최면 연구에 헌신하여 많은 최면 관련 논문과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최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하여 엄격하게 통제된 최면실험을 시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최면 과학의 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그의 실험정신은 최면분야에서 표준화된,
객관적인 실험절차에 의한 최면실험 전통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또 다른 유명한 심리학자로서 힐가드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1949년에 미국심리학회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스탠포드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서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그는 1957년에 최면연구를 위한 실험실을 만들어 이때부터 오랜 기간동안
같은 대학교의 정신과 의사이며 교수였던 부인 조세핀과 함께 최면연구에 몰두하여
수백 편의 최면관련 논문과 다수의 저서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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