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브로이어(Joseph Breuer : 1842~1925)는
히스테리 소녀를 치료하면서 새로운 치료기법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환자는 의식상태에서는 알 수 없었던 증상의 원인을 최면상태에서 밝혀낼 수 있었고,
분명하고도 이성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으며, 저항도 줄어드는 현상을 보였다.
그 환자는 물을 마시지 못하는 장애를 겪고 있었다.
그녀는 최면상태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컵의 물을 개가 마시는 것을 보고 심한 메스꺼움을 느꼈던 일을 기억해냈는데,
최면에서 깨어나 그러한 설명을 들은 뒤 곧 물을 마실 수 있게 되면서 증상이 치유되었다.
이로써 ‘최면분석’이라는 분야가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프로이트(Sigmund Freud : 1856~1939)는 브로이어의 연구에 매력을 느끼고 낭시와 살페트리에르 의대에서
최면을 연구하고 샤르코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최면분석의 다양한 기법을 연구하고 임상에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최면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는 수면암시의 단조로움에 싫증을 느끼기도 했고,
자신의 권위적인 기법에 반응을 하지 않는 환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환자의 최면상태를 보면서 무의식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비록 이러한 발견을 한 것이 그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정신병리의 주된 원천으로서
무의식을 인정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점들에 기초하여 정신분석학을 창시할 수 있었다.
치료를 위해 최면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번번이 최면유도에 실패하여 좌절해 있던 프로이트는
어느 날 자유연상이라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다행히 이 방법이 성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는 최면을 버리게 되었다.
그는 최면은 저항을 없애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회피하게 하며 불완전한 정보와
제한된 치료효과밖에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이후의 많은 추종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최면을 버리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비록 말년에 다시 최면에 다시 관심을 가지진 했으나,
1900년 이후 대세가 되어버린 정신분석학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현대
프로이트는 당시에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최면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0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최면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f Hypnosis)에는
브라질, 캐나다, 에콰도르, 이집트, 쿠바, 콜롬비아, 그리스, 멕시코 등지의 최면사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최면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겨우 명맥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전후에 전쟁신경증 환자들이 늘어난 반면에 심리치료가의 수가 부족하여 사회문제가 되었고,
이에 따라 자격있는 치료자와 신속한 치료효과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시 최면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치료자와 학자들이 최면의 치료효과를 밝혀냈다.
1941년에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미국의 에릭슨(Milton Erickson)은 환자로 하여금
최면상태에서 어릴 때의 결정적 사건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급성 히스테리적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5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치료 상황에서 최면의 유용성을 높여나감으로써
당대의 최고 최면치료사로 이름을 떨쳤다.
에릭슨의 이러한 작업은 후에 신경-언어 프로그래밍(Neuro-Linguistic-Programming : NLP)이라는
새로운 심리치료 분야를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
1964년에 미국의 엘먼(Dave Elman)은 처음으로 퇴행요법에서 최면의 유용성을 밝혔고,
일반치료와 치과치료에도 최면을 적용했다.
그는 환자를 재빨리 증상의 원인으로 퇴행시키는 방법인 급속 유도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이상과 같이 20세기 이후,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에는 많은 연구자와 임상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최면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2차대전 이후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노이로제 치료에 최면이 매우 유용하다는 점이 확인된 것은
최면에 대한 관심을 새로이 불러일으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5년에 이르자 미국에서는 최면을 활용하는 전문가가 200명 정도로 늘어났고,
이들의 노력에 의해 1958년에는 미국의학협회가, 1961년에는 미국정신의학회가 최면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1955년에는 영국 의학회에서 최면을 정식으로 인정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기점으로 많은 연구자와 학자들이 최면에 종사하거나 관여하게 되면서
전문적인 최면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1947년에는 임상 및 실험최면학회(Society for Clinical and Experimental Hypnosis)가,
1957년에는 미국임상최면학회(American Society for Clinical Hypnosis)가 창립되었으며,
1960년에는 미국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가
심리최면(Psychological Hypnosis)분야의 자격위원회(American Board of Examiners in Psychological Hypnosis)를
둠으로써 심리학에서 임상과 연구 차원에서의 최면이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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