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심리마당/최면

나를 더욱 사랑하는 법, 그리고 자기최면

설기문 2008. 12. 3. 13:17

 

 

 

'일상의 보편적 최면현상'이란 개념이 있다.

즉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수없이 많은 최면현상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일상의 보편적 최면현상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느라,

또는 휴대폰 전화 통화를 하느라 그 정거장을 지나친 일은 없는가?

당신은 재미있는 책을 읽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을 세운 적이 없는가?

당신은 재미있는 TV를 시청하느라 옆에서 전화벨이 울려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적이 없는가?

당신은 생각에 잠겨서 걸어가는 동안에 옆에서 아는 사람이 지나가도,

심지어는 인사를 건네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없는가?

당신은 과거에 사고가 났던 자리에 가면 괜히 기분이 언짢아 지고 그래서 피하고 싶어한 적이 없는가?

당신은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등 앞에서 멈추어서 푸른 색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가

혼자서 생각에 잠기거나 중요한 휴대폰 통화를 하는 가운데 이미 푸른 신호등이 바뀌었는데도

혼자만 남아 있다가 당황한 적이 없는가?

이 모든 것은 모두 잠깐 동안이지만 자기최면에 빠져 있었던 예에 해당한다.

 

집단최면에 대한 개념으로 사람들의 개인행동에서 나타나는 위에서와 같은 최면현상을 개인최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루 생활 동안에 수시로 자기최면 상태로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기에 자기최면에 대해서 일부의 사람들이

특별한 상황에서 특정한 형식으로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눈이 하나 뿐인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하나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정상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어느날 두 눈이 달린 사람이 이곳으로 온다면 그는 '장애인'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 눈이 하나 뿐인 세상의 사람들은 그 하나 뿐인 것을 정상으로 여기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집단최면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집단최면 속에서 개인은 개인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최면속에 빠져서 살아가게 된다. 어느 완고한 가정에서는 자녀, 특히 딸은 반드시 밤 9시 이전까지 반드시 집에 들어와야 한다는 아버지의 원칙을 법칙처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의 딸은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매일 9시가 되면 미국으로 까지 전화를 하여 딸이 집에 와 있는지를 확인하곤 하였다.

어느 날 딸은 저녁시간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9시가 가까워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조금 늦더라도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마무리하고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괜히 지금 공부를 중단했다가 집에 가서 새롭게 다시 공부하려면 능률이 오르지 않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9시가 되었어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아버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9시에 집으로 전화를 하였고

딸이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노발대발하였고 후에 딸과 통화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딸에게 무조건 귀국하라고 하였다.

가정교육이 되지 않고서 공부가 필요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성격을 아는 딸은 정말로 그 일로 인해 귀국을 했어야 했다.

어느 방송에서 본 모 여교수의 이야기를 옮겨 적어보았다.

 

아버지의 입장과 태도가 과연 옳은 일인지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강력한 자기최면의 현상을 볼 수 있다.

특정한 믿음이나 가치관이란 것은 개인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개인 삶을 지배하고 행동을 규제한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결국 자기최면의 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어떤 사람은 중요한 시험에서 실패하는 순간에 '아, 이제 내 인생은 끝이로구나' 라는 자기최면에 빠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실패를 했지만 재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길을 택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인생은 끝'이라는 자기최면에 빠져서 재기의 노력을 포기하거나 실제로 자신의 인생을 끝내는 우를 범하게 된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는 가운데 무려 만 번의 실패를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실패를 한 것이 아니라 전구에 불이 오지 않는 방법을 만 가지나 알았다고 하였다.

에디슨은 스스로 '실패자'라는 자기최면을 거부한 셈이다. 만약 그가 '실패자'라는 자기최면에 걸렸다면

발명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최면에는 부정적 자기최면과 긍정적 자기최면의 두 가지가 있다.

부정적 자기최면은 성공하는 인생에 도움되지 못하고 방해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도망가지 못하는 야생코끼리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긍정적 자기최면은 오히려 성공에 도움되고 성공을 위한 삶을 위한 영양분이 된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의 영웅이요 영국 프로축구 맨유에서 활약하는 축구선수 박지성은 언제나 운동장에 들어갈 때, 나는 이 운동장에서 최고라고 자기최면을 건다고 한다.

이것은 긍정적 자기최면이다. 우리의 성공하는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은 부정적 자기최면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박지성이 가졌던 긍정적 자기최면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2001년 3월 이천수를 직접 보기 위해 효창구장을 찾은 히딩크 감독은 "기술은 좀 있는 것 같지만

전체적 움직임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천수는 "월드컵에 내가 뛸 자리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매진했고 결국 성공했다.

잘 알려진 대중가수 채연이 섹시 포즈의 진수를 선보여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그녀는 TV 프로그램의 촬영장에서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춤을 추듯 자연스럽게 다양한 포즈를 선보였다.

그녀는 평소에 무대에 서면 난 섹시한 사람이라고 자기 최면을 건다고 하였다.

또 평소에 영화, 동영상, 화보 등을 열심히 보면서 섹시한 표정과 포즈를 연습한다고 하였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나는 나의 능력을 믿으며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난도 이겨낼 것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나를 만들 것이며 항상 배우는 사람으로서 더 큰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늘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새롭게 일할 것이며 어떤 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성공시킬 것이다.

나는 항상 의욕이 넘치는 사람으로서 행동과 언어, 그리고 표정을 밝게 할 것이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으로서 마음이 병들지 않도록 할 것이며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나이가 몇 살이든 스무살의 젊음을 유지할 것이며

한 가지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나라에 보탬이 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나의 신조를 매일 반복하며 실천할 것이다.

 

위의 글은 미국 메이저 프로야구 선수인 박찬호의 홈페이지(www.chanhopark61.com)의 첫 화면에 소개된 것이다. 이 글에는 역경에 굴하지 않으려는그의 각오가 절실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글은 원래 그가 존경한다는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이 매일 아침 외는 말들이기도  하다.

그를 본 따 박찬호 선수도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문으로 매일 아침 이 문장을 외운다고한다.

그는 또한 나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 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아침 마다 자신에게 스스로 명령을 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인 셈이다. 

인생에서 불만을 갖거나 불평의 요소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갖거나 또 마음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스스로의 우물에 갇혀 있거나 부정적인 '자기최면'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빨리 우물에서 빠져나와서 더 넓은 세상을 볼 필요가 있다.

즉 우물이라는 부정적인 자기최면에서 벗어나서 보다 나은, 세상이라는 긍정적 자기최면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봤을 때 자기최면이란 것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의 행동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험불안을 겪는 학생들은 시험에 임할 때 시험성적이 나쁠 것을 생각하고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야단맞을 것을 예견하면서 두려워한다.

그리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나는 시험을 못 칠 것이다'는 부정적 자기최면에 빠지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는 부정적 자기최면에 빠지기 때문에 시험에 대해서 두려워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과거에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또 다른 도전의 상황에서 과거의 실패 경험이 생각남으로써

또 다시 실패할 것이라는 자기최면에 빠지고 그래서 도전을 포기하거나 아예 도전 자체를 시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우리 속담에서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하지 않았을까?

자라 때문에 놀란 사람이 자기최면에 빠져서 자라와 비슷하게 생긴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다는 것이다.

자기최면이란 어쩌면 마음의 습관일지도 모른다. 몸과 행동에도 습관이 있듯이 마음에도 습관이 있다.

특정한 운동을 계속하거나 기능을 연습하면 우리 몸에는 그 운동이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근육이나 행동의 습관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습관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쉽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고

반면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침에 기상하는 시간이 거의 일정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사람은 아침마다 거의 같은 시각에 눈이 뜨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들마나 자기 나름대로의 식사패턴이 다를 수 있으며

공부의 패턴, 대인관계의 패턴, 휴일을 보내는 패턴들이 제각각 다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습관인데 그러한 습관은 자기최면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 있다.

습관은 잠재의식에서 생기고 잠재의식이 습관을 통제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습관을 고치기는 힘들다.

만약 습관이 의식 차원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의식적 차원에서 습관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재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습관은 의식 차원에서 접근되기 어렵다.

그러나 자기최면을 잘 활용함으로써 습관교정이 가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최면은 습관을 지배하는 잠재의식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재의식에 대해서 제대로 앎으로써 자기최면을 보다 잘 활용할 수가 있고

그 결과 습관도 잘 바꾸고 문제해결도 보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잠재의식을 잘 활용함으로써 부정적 자기최면에서 벗어나서

우리에게 필요한 긍정적 자기최면으로 효과적으로 잘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잠재의식은 습관을 통제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잠재의식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지배하는 잠재의식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을 추구한다.

그런데 성공이란 무엇일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달성하는 것이 곧 성공이 아닐까?

사람들마다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다를 것이기에 추구하는 성공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성공을 추구한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런데 그 성공을 이룩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마음으로 성공을 바라고 그 성공을 향한 염원을 갖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성공을 지향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행동은 마음에 의해 지배되는데,

그 마음은 곧 의식과 함께 잠재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뒤에서 설명할 마음의 특성과 함께 잠재의식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때

보다 효과적으로 성공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