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문 칼럼

아침 산책길에서

설기문 2008. 9. 16. 23:32

 

 

추석을 전후하여 그동안 마음만 먹었던 아침걷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요즘 들어 건강을 좀 더 적극적으로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워낙 걷는 일을 좋아하는 탓에 걷기 좋은 우리 동네 산책로를 걷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보면 40분 정도 걸리는 정겨운 이쁜 산책로이지요.

개울에 물소리가 들려오고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결에 가을 냄새가 가득히

묻어옵니다. 가을은 그렇게 나름의 향기를 담은 바람을 따라 오나 봅니다.


쑥부쟁이가 하늘하늘 보랏빛 가녀린 꽃잎을 흔들며 여름을 지나 온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만히 꽃잎을 들여다보면 조심스런 아낙의 손길마냥 잔잔한 꽃잎들이 애잔해 보입니다.

하루 일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여린 꽃들은 어떤 마음이 되는 것일까?

한여름 지천으로 피다 지친 참나리 가지들이 맥없이 서로를 기대고 있음을 보며

외로움은 사람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연이 다한 여름날을 그리며 그들도

외로워 할 것만 같습니다. 한여름의 축제처럼 빛나던 주홍빛 추억들을 생각하며

그들은 기꺼이 가을 속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가을맞이는 내 옷차림 속에 가리워져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지만

나는 내 안의 낙엽들을 떨구어 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집니다.

버려야 할 것은 의연히 버림으로써 겨울을 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나무들처럼

나는 무엇을 버리고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차마 떨구어 내지 못하고 지니고 있음으로 버거움 삶을 힘겨워하지나 않는지......

가을이면 기꺼이 낙엽으로 낙화하는 그들은 나보다 훨씬 의연하고 용기 있어 보입니다.


아직은 푸른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있지만

그들의 낯빛 속에는 가을을 머금고 있음이 확연한 날들,

이제 세상엔 가을이 내리고 있음을 알아갑니다.

한낮이 지나고 어둠이 내리듯,

한여름을 보내며 우리는 가을을 맞습니다.


걸으면서 바라보는 산등성이와,

걸으면서 바라보는 하늘과,

내가 걸을 때 마다 함께 움직여 주는 무수한 내 몸의 근육들과

땀 흘리는 살갗에 대한 정겨움,

걷는 동안, 내가 산책하는 동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던

위대한 철학자의 말처럼 나 역시, 날마다 걸어보는 이 길에서

내 속의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가볍게 실타래 풀리듯이 풀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가을이라는 이름만큼 의미 있는 시간들로 충만한 날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릴케의 싯귀처럼 아직 덜 익은 곡식들을 익게 하고

과일나무의 단맛을 더해가는 햇살처럼

우리 마음속에서 좀 더 발효되어야 할 무수한 사념들이 단맛이 나도록

갈무리 되고 깊은 숙성이 되는 귀한 시간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한 치 후회 없는 나날들이 되었으면 더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