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심리마당/NLP

[스크랩] 얼 사람과 몸 사람

설기문 2008. 3. 30. 16:39

 

 

얼 사람과 몸 사람


웨인 W. 다이어


이 글은Wayne W. Dyer 박사의 「Real Magic」제2장 ‘Becoming A Spiritual Being’에서 Spiritual versus Nonspiritual Beings : The Spiritual Dozen 부분을 한글로 옮긴 것입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말씀을 빌려와서, spiritual being(영적인 사람)을  얼 사람으로, nonspiritual being(비 영적인 사람, 물질적인 사람)을  몸 사람으로 옮겼습니다.〉



나는 이 글에서, 눈에 보이는 물질 차원과 보이지 않는 비물질 차원을 함께 의식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켜 얼 사람(spiritual being)이라 불렀고, 물질 차원만 의식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켜 몸 사람(nonspiritual being)이라 불렀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과, 그 사람이 무신론자냐 아니면 어떤 종교에 속해 있느냐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몸 사람이라고 해서 그릇되었다거나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물질적(physical, 육체적) 방식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일 따름이다.

아래에, 얼 사람의 길을 몸 사람의 길에 대조하여 열두 가지로 열거해본다.


 

1. 몸 사람은 다섯 가지 감각으로만 살아간다. 그래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얼 사람은 다섯 가지 감각 말고도 다른 감각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용하여 이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을 안다.


몸 사람으로 충실히 살아가면서 동시에 얼 사람으로 되고자 애쓸 때 당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더욱 선명하게 의식하며 살게 된다. 이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감각들(senses)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을 다섯 감각들 가운데 하나로 지각(知覺)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몸(body)을 가진 영혼(soul)이라는 사실과 그 영혼이 태어남과 죽음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게 된다. 영혼은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그 어떤 법칙과 원리에도 구애되지 않는다. 얼 사람으로 된다는 것은, 스스로 다중감각(多衆感覺, multisensory)을 지닌 존재로 될 권리를 선택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개리 주카브가 「영혼의 자리」(The Seat of the Soul)에서 말한 대로, “다중감각을 지닌 사람의 경험은 다섯 가지 감각만으로 사는 사람의 경험에 견주어 제한을 덜 받는다. 그들에게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고, 불필요한 어려움을 피할 기회들도 더 많이 주어진다.”



2. 몸 사람은 자신이 우주에서 동떨어진 홀몸이라고 믿는다. 얼 사람은 자신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믿는다.


얼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스승들과 지켜보는 이들이 신성한 안내자로 함께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평안하게 살아간다. 우리가 영혼을 가진 육신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영혼으로 자기를 본다면, 우리 자신의 영원한 부분(eternal part of ourselves)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어 우리를 돕는다. 일단 이 믿음이 굳어져서 흔들리지 않게 되면, 몸의 다섯 감각만 고집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리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설득해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것을 가리켜 어떤 사람은 간절한 기도(intense prayer)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God)이라 부른다. 또 어디에나 있는 우주적 지성(intelligence)또는 힘(force)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영적 안내자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 더 높은 자아(higher self)를 가리켜 뭐라고 부르든지, 그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의 언어로는 담지 못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몸 사람에게는 이 모두가 도대체 웃기는 자장면이다. 그는 이 지구상에 어쩌다 얼굴을 내밀어 한 번뿐인 인생을 살고 있으며, 그를 도와주는 유령 따위는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다. 몸 사람에게는 오직 물질적인 우주가 있을 따름이고, 물질세계를 조작하고 지배하는 것이 그의 인생목표다. 얼 사람에게 물질세계는, 더 높은 차원의 사랑 안으로 흡수되려는 특별한 목적을 이루고자 성숙하고 배워나가는 장(場)이다.


몸 사람들도 지극히 높으신 분 또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느님은 그들 안에 내재하는 힘이 아니라, 언제고 자기네를 심판할 동떨어진 어떤 힘이다. 바울로나 프란체스코가 말하는, 직접적으로 하느님 체험을 하기까지는, 더 높은 자아의 도움을 받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보지 않는다. 얼 사람들은 신성한 안내자와 긴밀한 접촉을 경험하는 가운데, 자기들이 외톨이가 아니며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에서 기적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3. 몸 사람은 자기 바깥의 힘에 관심한다. 얼 사람은 자기를 힘있게 만드는 데 관심한다.


바깥의 힘(external power)은 물질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쓰이는 힘이다. 군대와 전쟁의 힘, 법과 조직의 힘, 사업과 주식시장의 힘이 그것이다. 그것은 자기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힘이다. 몸 사람의 관심은 오직 이 힘에만 쏠려 있다.  반면에, 얼 사람은 자기 자신한테 힘을 불어넣어 더 높은 차원의 의식 (consciousness)으로 올라가는 데 관심을 모은다. 그로서는 타인에게 힘을 부린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힘을 축적하는 데 흥미가 없고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화목하게 살면서 진짜 마법을 경험하도록 돕고자 할 뿐이다. 그것은 남을 판단하지 않는 사랑의 힘이다. 그 힘에는 증오도 없고 분노도 없다. 그것이야말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희생시킬 필요가 조금도 없이 그들과 더불어 살 수 있게 하는 진정한 힘이다.

 

얼 사람은 인간의 마음이 물질계에 얼마나 힘 있게 작용하는지를 잘 안다. 자기중심을 향하여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 남을 해치는 데 조금도 관심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그 어떤 물리력(physical force)보다 강하다. 합기도를 비롯한 동양무술의 근본은 적을 제압하기 위한 힘을 기르는 데 있지 않고 같은 힘을 써서 위기를 면하는 데 있다.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데 바깥의 힘(external force)을 사용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아 앎으로써 맛보게 되는 내면의 기쁨이야말로, 본인에게 가장 큰 힘이 된다. 몸 사람들은 다른 길을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어쩌다가 영적 스승들에게 복종하겠노라 서약하지만, 그래서 남을 지배하기 위해 힘을 쓰지 말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도무지 다른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하고 조화롭고 선한 기운에 복종하여, 그 누구도 무엇도 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과 손을 잡는 것이요,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유일한 목적이기도 하다. 더 이상 남을 지배하거나 많은 물건을 소유하거나 주변 환경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면, 당신은 바깥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에서 눈을 돌이켜 당신 자신을 강하게 하는 쪽으로 관심을 모을 것이다. 스스로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을 희생시켜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스스로 강한 사람은 남을 희생자로 삼으려는 생각조차 품지 않는다. 물론, 스스로 희생자가 될 이유도 없다. 오직 자기를 강하게 하는 데 관심을 모으는 사람은, 남을 희생시키지도 않고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건에 연루되지도 않는다. 자기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를 구태여 남에게 입증할 필요가 없으니, 그래서 결국 남들에게도 힘을 실어줄 기회를 얻는다.

 

당신은 남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교만해서도 아니고 전능해서도 아니고, 당신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 사람의 길이다. 바깥으로 힘 부리기를 그만두고 안으로 당신 영혼의 목적과 손잡을 때, 그때 당신은 참된 마법사로 살게 된다.



4. 몸 사람은 자기가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있다는 느낌으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자기 밖에 없다. 얼 사람은 자기가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같은 길을 가는 동행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스스로 남들한테서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더욱 자기-중심적으로 되어 남의 문제에 덜 관심하게 된다. 지구 한 구석에서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 말을 듣고 동정심을 느끼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의 대답은 결국, “그건 내 문제가 아니야”로 돌아가 버린다. 남들한테서 스스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몸 사람은 갈수록 자기 문제에만 관심하고, 간혹 남을 의식하더라도 그에게서 무엇을 얻거나 취해서 자기를 이롭게 할 것인지를 생각할 뿐이다.

 

얼 사람은 우리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온전하심을 본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자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고 그들을 외모와 행실로 규정하고 그리하여 아예 무시하거나 아니면 이용가치로만 보는 몸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겪게 되는 안팎의 충돌과 갈등을 상당량 피할 수 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서로 갈등하고 충돌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얼 사람은 자신을 관통하는 같은 힘이 다른 사람들도 관통하고 있음을 알기에 저절로 황금률[“네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하라.”]을 지킨다. 내가 남에게 하는 짓은 곧 내게 하는 짓이요 그 반대도 또한 같다고, 얼 사람은 생각한다. “네 몸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얼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몸 사람에게는 말도 안되는 넌센스다. 자기가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몸으로 느끼면서 남을 좋지 않게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얼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규정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양자물리학은 모든 물질의 소립자들이 서로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음을 입증해냈다. 모두가 하나라는 진실이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 밝혀진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공간이라고 생각해온 물리적 거리가 보이지 않는 힘의 연결을 배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연결이 분명 존재한다. 얼 사람은 이 보이지 않는 힘이 자기와 다른 모든 것들을 연결짓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자기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그렇게 대한다. 그러나 몸 사람에게 그와 같은 ‘도약’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앎’의 문제다.


몸 사람은 자기를 다른 존재들과 동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로 알고, 그렇게 행동한다. 얼 사람은 존 도온(John Donne)의 다음 말에 담겨 있는 진실을 안다. “어떤 사람도 섬이 아니다. 모두가 그 자체로서 온전한 존재다. 모든 사람이 대륙의 한 조각이고 망망대해의 한 부분이다. …모든 사람의 죽음이 나를 덜어낸다.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서 종이 울리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을 위해서 울고 있다.”

얼 사람은 진실로 인류에 속해 있고, 그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5. 몸 사람은 인생사 모두를 원인/결과의 틀 안에서 해석한다. 얼 사람은 단순한 원인/결과의 법칙을 초월한 더 높은 힘이 우주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안다.


몸 사람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세계에서만 살아간다. 사람이 씨를 심으면(원인) 그 열매를 거둔다(결과).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화가 나면 화를 낸다. 이는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이요 행동이다. 왜냐하면 언제 어디서나 행동의 법칙―모든 행동에는 그와 동일한 크기의 반동(reaction)이 있다―이 작용하는 데가 바로 물질세계이기 때문이다.

 

얼 사람은 뉴톤 물리학을 넘어, 전혀 다른 영역에서 살아간다. 그는 사람의 생각들이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람 한평생 3분의 1을 차지하는) 꿈속에서는 원인/결과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순수한 생각만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꿈에 당신은 금방 사십대였다가 열두 살짜리 아이가 되기도 하고, 자동차를 타고서 고향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헨리 데이빗 도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이지 깨어 있는 상태와 꿈이 어떻게 다른지를 모르겠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상상하는 모습의 자기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얼 사람은 사람의 생각들이 고전 물리학 법칙에 종속되지 않으며, 저마다 자기 생각으로 자기 현실을 창조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순전히 원인/결과의 법칙에 따라서만 살아간다면 그는 결코 기적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기적이나 진짜 마법은 물리학의 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과 신념 자체가 사실은 기적이다. 그것들은 이 물질계를 운영하면서 사용하는 우리의 유일한 도구들이다. 원인/결과의 법칙에 합당한 설명만으로 살아간다면, 진짜 마법이 이루어지는 세계로는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내는 모든 소리들이 텅 빈 침묵에서 나오듯이, 우리의 생각과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 또한 우리의 참 자아 중심에 있는 침묵 공간에서 오는 것이다.



6. 몸 사람은 움직임의 동기를 성취, 실행, 획득에 둔다. 얼 사람은 움직임의 동기를 윤리, 맑고 깨끗함, 삶의 고상한 품격에 둔다.


몸 사람은 오로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앞서 나가고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하여 살아간다. 체육의 목적은 겨루어 이기는 데 있다. 지금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 앉아 있으며 은행잔고가 얼마 남았는지에 따라서 성공 인생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으며 우리네 문화가 그런 가치관에 뿌리를 내렸고 또 사실 나쁘다고 비난할 것도 분명 아니지만, 그러나 얼 사람의 눈길은 결코 그런 것들에 쏠려 있지 않다.

 

얼 사람에게는 자신의 목적과 얼마나 부합된 삶을 살고 있는지에 성공여부가 달려 있고, 그 성공은 무엇을 이루었느냐 또는 무엇을 얻었느냐 로 측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기만 하면,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이 모자라지 않게 충당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목적에 부합된 삶에는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것이 포함된다는 사실도 안다. 캘커타 빈민굴에서 비천한 사람들을 섬기며 오랜 세월 살아온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에서 인생의 참 목적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열매는 섬김이요, 섬김은 행동하는 자비다. 자비를 베푸는 것과 종교는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 모두 사랑하고 사랑받으라는 유일한 목적 아래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얼 사람은 인생의 안팎을 경험한다. 얼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성자가 될 필요는 없다. 인생에는 성취와 획득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고, 무엇을 얼마나 많이 축적했느냐보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남에게 주었느냐에 따라서 참된 성공 인생이 판가름 난다는 것을 알면 된다. 얼 사람은 자기가 알몸으로 세상에 왔다가 알몸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영원 속에 괄호 쳐진 ‘일생’이라는 이름의 짧은 순간 속에서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남에게 내어주는 일이다. 얼 사람도 경우에 따라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지만,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것을 동기로 삼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윤리 도덕에 어긋나지 않고 맑고 깨끗하게 살면서 자신의 인생목적을 착실하게 이루어나가는, 거기에 삶의 핵심이 있다. 자기만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며 더 많은 것을 얻는 데 매달려 있는 한, 당신은 결코 진정한 삶의 기적을 맛볼 수 없다. 맑고 깨끗하게 살면서 그러한 삶이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때, 당신의 바로 그 마음에서 기적 같은 마법이 빚어진다는 사실을 또한 알게 될 것이다.



7. 몸 사람은 명상수련 따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얼 사람은 그것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몸 사람에게는, 시간을 정해놓고 가만히 앉아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주문을 외고 마음을 비우고 자기 안에 있는 스승과 말을 주고받는 등―이 아무래도 미친 짓처럼 여겨진다. 그에게는 인생 문제의 모든 답이, 열심히 일하고 투쟁하고 견뎌내고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고 다시 새 목표를 세우고, 골육상쟁하는 세상에서 다투어 이기는 데 있다.

 

얼 사람은 명상 수련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힘을 안다. 명상이 자기로 하여금 더욱 깨어 있으면서 명료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안다. 스트레스와 긴장에서 풀려나는 데 명상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도 안다. 얼 사람은 평화로운 고요함 가운데 대답을 구함으로써 신성한 안내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본인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는 자기가 여러 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며 보이지 않는 마음이 명상을 통해서 지극히 높은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음을 안다. 깊은 명상 상태에서 육신을 떠나, 약물의 힘을 빌리면 일시적으로 맛보게 된다는, 황홀한 망아(忘我)의 경지에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어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의 온갖 비극은 홀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데서 온다.”


얼 사람이 맛보는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는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배우는 데 있다. 명상을 계속하면, 전보다 훨씬 가벼워지고 동시에 훨씬 생산적으로 된 자신을 느낄 것이다. 몸 사람에게는 이 모든 일이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얼 사람에게는 인생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해 줄 전혀 새로운 현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8. 몸 사람은 직관(直觀)을 고작 육감(肉感)이나 아니면 어쩌다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우연한 생각 정도로 안다. 얼 사람에게 직관은 육감 이상이다. 그는 안에서 일어나는 직관을 하느님 또는 신성한 안내자의 가르침으로 여겨 그것을 가볍게 다루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의 직관(intuition)을 무시했다가 후회할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안해도 될 고생을 겪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몸 사람에게 직관이란,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어쩌다가 우연히 떠오르는 토막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흔히 무시되거나, 습관적인 행동방식에 의하여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얼 사람은 자기의 직관능력을 더욱 강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자기의 직관이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안에 우연의 일치 정도가 아닌 무엇이 작용하고 있음을 안다.

 

얼 사람은 비 물질세계가 있음을 알고, 다섯 감각으로만 감지되는 세계에 붙잡혀 있지 않는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생각과 느낌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직관은 무엇에 대한 생각 이상(以上)이다. 그래서, 얼 사람은, 마치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또는 어떤 위험하고 좋지 못한 일을 피하라는, 부드러운 지침을 받는 것처럼 행동한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직관은 분명히 우리의 삶에 작용하는 무엇이다.

 

몸 사람에게 그것은 단순한 육감에 지나지 않고 그래서 특별히 연구하거나 개발할 대상이 못된다. 그저 마음이 좀 이상한 방식으로 움직인 것일 뿐, 그러다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얼 사람에게 직관은 하느님하고 대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무슨 일에 직관이 떠오를 때, 하느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긴다. 어떤 강렬한 느낌이 느껴질 때에는 언제나 그 느낌을 좇아 움직인다. 나도 한 때는 그것들을 무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모든 직관적 느낌이 언제나 ―말 그대로, 언제나― 나를 성숙으로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잘 안다. 때로는 직관이 내게 어디로 가서 글을 쓰라고 일러주기도 한다. 그러면 그리로 가서 글을 쓰는데 언제나 쉽게 물 흐르듯이 잘 써진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했다가는 무진 애를 쓰는데도 자꾸만 글이 막혀버린다. 비단 글 쓰는 일뿐 아니라 삶의 모든 구석에서 직관의 도움을 받는다. ‘나는 무엇을 먹을까‘에서 시작하여 무엇에 대하여 글을 쓰고 아내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까에 이르기까지 은밀하게 직관과 상의한다. 나는 직관을 명상하고, 신뢰하고, 연구하고, 그것을 더 잘 알아차리려 노력한다. 가끔 그것을 무시했다가 걸 맞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 다음에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한다.

 

사람이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고 그것을 ‘기도’라고 부른다면,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을 두고 어리석은 미친 짓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내가 글에서 읽은 모든 얼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느낌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에게 직관은 무시할 수 없는 사랑의 안내자다.



9. 몸 사람은 악을 미워한다. 그래서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 얼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여 싸우는 모든 대상이 자기를 약하게 하고, 자기가 위하고 지지하는 모든 대상이 자기를 강하게 한다는 사실을 안다.


몸 사람은 수많은 싸움들 속에 묻혀 있다. 그의 손에는,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과 싸우는 데 쓰이는 무기들이 언제나 들려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미워하는지 알고 있으며, 그릇된 것들을 볼 적마다 속으로 못 견뎌한다. 심신 양면으로 그의 대부분 에너지가, 악하고 그릇되었다고 판단되는 것들과 싸우는 데 소모된다.


얼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반대하는 데 바치지 않는다. 그들은 기아(飢餓)와 싸우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며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는 날을 내다본다. 그들은 반대하는 것과 싸우지 않는 대신, 찬성하는 것을 위하여 일한다. 기아와의 싸움은 그 싸우는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화가 나서 절망하게 만든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살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그를 더욱 힘 있게 만든다. 얼 사람은 전쟁을 반대하지 않고, 평화를 찬성하여,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는다. 그들은 마약이나 가난과의 전쟁에도 동참하지 않는다. 전쟁에는 전사와 병사들이 필요하고, 전쟁이라는 수단으로는 끝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 사람은 자기 마음과 몸에 있는 힘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젊은이들을 돕는다. 그들은 아무와도, 무엇과도, 싸우지 않는다.

 

증오와 폭력을 동원하여 악과 싸울 때, 당신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바로 그 악의 증오와 폭력을 편들고 있는 것이다. 테러와 전쟁을 반대하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들이 반대하는 테러와 전쟁에서 눈길을 돌이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일에 참여한다면, 테러와 전쟁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평화를 위하여 1달러를 쓰면서 전쟁을 위해서는 2천 달러를 쓰고 있다. 이 지구별에서 사람들은, 전쟁을 하고 살생무기의 성능을 개발 하는데 일분(一分)당 약 2천 5백만 달러를 쓰는데, 그 일분 동안에 굶어 죽는 사람(대부분이 아이들)이 대략 40명쯤 된다.

그것은, 아이들이 대부분인 승객을 가득 실은 747 보잉 여객기가 10분마다 한 대씩 추락하여 승객 모두 죽는 것과 같다. 아이들 40명쯤 먹이는 데 돈이 얼마나 들겠는가? 이 어이없는 통계수치를 누가 되돌려놓을 것인가? 지구 행성에 거주하는 얼 사람들? 아니면 몸 사람들? 어찌 생각하든, 당신이 스스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하여 일하고 이 짧은 인생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스스로 힘을 얻는 데 관심하는 대신, 무엇을 반대하여 그것과 투쟁하는 한, 당신은 문제를 해소하는 쪽이 아니라 일으키는 쪽에 서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있다. 얼 사람들은 증오에 묶여 있지 않다. 그들은 자기네가 무엇을 위하고 있는지 알고, 그것을 현실로 옮기는 데 몸과 마음을 쏟는다. 얼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사랑과 조화를 위해서 살아간다. 당신이 상대하여 싸우는 모든 것이 당신을 더욱 약하게 한다. 당신이 위하여 일하는 모든 것이 당신을 더욱 강하게 한다. 삶에서 기적을 창조하려면, 당신이 위하여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당신의 삶에서 모든 증오를, 비록 그것이 증오에 대한 증오라 하더라도, 지워버릴 때, 당신은 당신의 삶을 통해 진짜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10. 몸 사람은 우주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생명 경외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는다. 얼 사람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본질인 생명 자체를 경외한다.


몸 사람은, 주카브의 말대로, “사람한테는 의식(consciousness)이 있고 우주에는 그것이 없다”고 믿는다. 그는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그뿐이고 따라서 우주에 져야 할 책임 따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몸 사람은 갈수록 오만해진다. 얼 사람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속에 하느님이 있다고 믿으며, 자기가 처해 있는 우주에 책임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생명에 경외심을 품고, 물질세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이 경외심이 그를 이끌어, 다른 모든 생명들과 그것들이 처한 환경을 감사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한다. 얼 사람은 생명의 순환들(the cycles of life)을 영원한 무엇의 출현으로 보아, 참된 경외심을 품고 존중한다. 그리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지구와 지구를 포함한 우주에 의식(consciousness)이 있고 자기의 삶이 현재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과거에 살았던 모든 것들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안다. 온갖 모양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보이지 않는 지성(intelligence)이 우리를 여기 이 모양으로 존재하게 한다. 그러기에, 생명을 경외하는 것은 곧 모든 존재들 안에 영혼이 있음을 아는 것이요, 그 영혼은 모두에게 존중받아 마땅하다.


얼 사람은 이 땅에서 필요한 만큼만 얻어내고, 같은 땅에서 살아 갈 후손들을 위하여 되돌려줄 것은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생명을 포함하여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데서 기적은 일어난다.



11. 몸 사람은 원한과 증오와 복수심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인다. 얼 사람은 가슴 속에 그런 것들이 들어올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얼 사람은, 모든 영적 스승들이 용서의 중요함에 대하여 말한 것을 알고 있다. 여기, 몇몇 중요한 종교의 가르침들이 용서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적어본다.

 

유대교 :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잘못한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기독교 : 베드로가 와서 여쭈었다. “주님, 저에게 잘못한 형제를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쯤 하면 될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라.”


이슬람 : 네 종을 하루에 일흔 번씩 용서하여라.

 

시크교 : 용서가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도교 : 원수를 덕(德)으로 갚아라.

 

불교 : 증오는 증오로 없애지 못한다. 오직 사랑으로만 없앨 수 있다. 이것이 영원한 법칙이다.

 

얼 사람에게는 말과 행실의 일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서 그의 신도(信徒)임을 자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용서는 가슴으로 하는 행동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자아를 남에게로 향한 원망과 복수심으로 가득 채우면, 인생에서 참된 기적을 경험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랑과 조화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남을 향한 증오는 더 많은 증오와 부조화를 불러올 따름이다. 누군가를 미워하여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삶에서 기적을 경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자주 외는 기도문의 중요한 대목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얼 사람들은 이것이 그냥 잠자리에서 형식적으로 중얼거릴 빈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12. 몸 사람은 현실 세계에 한계가 있으며, 비록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소수의 행운아에게 어쩌다가 일어난 사건으로만 본다. 얼 사람은 기적을 믿으며, 사랑의 안내자로부터 안내를 받고 진짜 마법을 경험할 독특한 능력이 자기에게 있음을 믿는다.


얼 사람은 기적이 현실임을 믿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적을 일으킨 힘이 여전히 우주 안에 있으며 자기도 그 힘에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몸 사람은 기적을 전혀 다른 빛으로 본다. 그에게 기적이란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자기가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얼 사람 되기란 결코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당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오랜 훈련이나 특별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바로 이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얼 사람 되기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자아(invisible self)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 상관없이, 오늘 당신은 얼 사람 되기를 선택할 수 있다. 어떤 특별한 종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거나 그 종교로 개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당신의 남은 생애를 이런 방식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면 된다. 속으로 결심했으면 벌써 당신은 얼 사람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우주의 정원에서 퍼옴

출처 : 빛의 길로
글쓴이 : 순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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