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문의 "죔죔기법"과 김상운의 “왓칭2”의 유사성, 그리고 인간의 다층 공간 이론을 통해서 본 전생치료와 빙의치료의 가치
최근에 나는 셀프힐링 기법으로서의 “죔죔기법”이란 책을 펴냈다. 물론 채널A의 “나는 몸신이다”라는 TV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 죔죔기법을 소개한 것이 먼저였지만 말이다. 몇 년전부터 개발하고 발전시킨 이 죔죔기법의 효용도가 너무 좋고 크기에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의나 상담시에 이것을 소개하고 적용해왔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도움받았던 사람들이 주변에는 너무 많기에 나로서는 이 죔죔기법을 단지 몇 사람에게만 아니라 전국에 아니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그러던 차에 이 죔죔기법을 TV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것이 좋은 반응을 얻었기에 아예 책으로 까지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죔죔기법의 핵심은 ‘주변시야’ (peripheral vision)라는 것이다. 주변시야란 한 마디로 “넓게 보는 것”이다. 우리는 바다나 높은 산에 갔을 때 자연스레 넓게 보게 된다. 하지만 문제에 빠져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그 문제나 스트레스에 빠져서 금세 시야가 좁아지게 되어 중앙시야 (foveal vision)나 터널시야(tunnel vision)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어떤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 (즉 중앙시야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멀리 보라”거나 “넓게 보고 생각하라”, “주변을 둘러보라”, “주변을 살펴보라”는 충고를 하게 되는데 이 모든 말들은 한 마디로 “주변시야를 가져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스트레스 상황이나 고통을 받고 있을 때에 말처럼 그렇게 주변시야를 갖기가 쉽지가 않다. 다시 말해서 어떤 문제에 빠져 있을 때 주변을 돌아보거나 멀리 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럴 때 그나마 마음의 여유를 갖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주변을 산책하거나, 좀 더 시간이 있다면 바다나 산에라도 갔다 오게 된다. 물론 그런 경우에 우리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 지고 머리도 맑아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곧 주변시야 효과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렇게 산책을 하거나 바다와 산을 갈 상황이 되지 못할 때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럴 때에 어떻게 하면 쉽게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신경쓰는 문제로에서 벗어나서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해질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없을지에 대해서 고민하던 나는 여러 가지 형태의 힐링기법들을 섭렵하는 가운데 독자적으로 “죔죔기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죔죔기법”은 어린 아기들이 두 손을 쥐었다 폈다는 반복하면서 죔죔 놀이를 하듯이 실제로 죔죔동작을 하면서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독백을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것이 기본방법이긴 하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변시야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앞을 보되 좌우의 두 눈 옆에서 죔죔하는 동작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눈동자는 앞을 향해 있지만 두 눈의 좌우에서 죔죔 동작을 하는 두 손의 움직임이 동시에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죔죔기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경우에 곧 주변시야 효과가 나타나게 되면서 시야가 넓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원래의 문제나 스트레스가 희석되거나 사라지는 효과를 체험하게 된다. 그야말로 우리는 이 ‘죔죔기법’을 통하여 불과 10초 전후에, 길어야 30초 내에 신기하고도 마법과 같은 힐링 효과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 방법은 너무도 쉽고 간단할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우습기도 한 동작을 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기 쉽다.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믿지를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고통을 겪는 가운데 이 “죔죔기법”을 통하여 효과를 본 사람들은 곧 놀람과 함께 자신의 효과에 대해서도 의심하다가 몇 번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확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곧 ‘전도사’로 바뀌게 되는 일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게 된다.
우리는 이 “죔죔기법‘을 통하여 안방에서도, 교실에서도, 커피숍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산이나 바다에 간 효과 즉 힐링효과를 불과 1분 미만의 시간에 보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는 최근에 이런 나의 생각이나 경험, 그리고 가르침을 좀 더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주는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즉 나는 “시야를 넓힐수록 마법처럼 이루어진다”는 주제의 책을 우연하게 접하게 되면서 깜짝 놀랐고 반가웠다. 왜냐하면 이 주제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도 비슷하지만, 내가 평소에 강의나 상담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들과 닮아 있는 익숙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 책은 곧 “왓칭2”라는 책이다. 이 책은 20여년간 방송 기자 생활을 했던 김상운이라는 저자가 두 명의 가족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비극을 경험한 후에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깨닫고 공부한 영적 내용을 과학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소개한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이미 그 1편에 해당하는 “왓칭”을 봤기에 이번에 두 번째로 나온 “왓칭2”책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꼼꼼히 살펴보는 가운데 처음 부분에서 뜻밖에 큰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왓칭2”에서 저지는 다음과 같은 의미깊은 그림을 통하여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다층적 공는 공간에 대해서 과학적 설명을 하였다.
이 그림에서 볼 때 흔히 우리가 생각하고 또 전통 과학에서 생각하는 인간은 몸을 중심으로 하는 가운데의 1번에 해당한다. 그래서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검사를 하게 되는 의학적인 장비들은 주로 이 몸을 중심으로 측정하고 검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몸 주변에는 감정과 생각의 공간이 별도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특히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생각과 감정이 쉽게 동조되고 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바로 이 감정이나 생각에서 문제가 생겨서 심리적 장애를 겪게 될 수가 있다. 그리고 감정과 생각은 곧 마음에 해당하는데, 이 공간은 그 속에 이미 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 즉 심리적 장애 때문에 몸의 장애나 불편함, 고통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에 몸의 문제 때문에 의학적인 신체검사를 하더라도 검사상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몸의 문제는 애시당초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쉽게 “신경성”이라거나 “스트레스성”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것은 곧 “신경을 많이 썼다”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몸의 증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곧 감정과 생각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범위를 더 넓혀볼 때 그 다음에는 영혼의 공간이 있다. 영혼의 공간은 폭이 더욱 넓어서 마음 즉 감정과 생각을 감싸고 몸이나 육신도 포함하게 된다. 이 정도 이야기가 나오면 곧 종교적 차원과 연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반드시 종교를 결부시키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에게는 종교와 관계없이도 영성(spirituality)이란 것이 있으니까 말이다. 영성이란 곧 영혼과 관련된 인간의 높은 차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차원은 곧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몸, 마음을 이미 포함하는 더 높고 넓은 것이다.
그런데 영성 차원에서 거론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곧 육신이나 마음차원까지도 뛰어넘는 영혼의 세계인데, 그 영혼과 관련해서는 영혼의 ‘영속성’(eternity)과 ‘불멸성’(immortality)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실상 이 부분은 데카르트-뉴튼에 바탕한 전통 과학의 입장에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양자역학이나 양자물리학 차원에서는 충분히 설명이 되기에 의미가 크다. 영혼의 영속성 때문에 전생(past-life)과 환생(reincarnation)의 논리가 실제적 현상이 가능해지게 된다.
우리가 어릴 때 겪었던 트라우마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고통을 받고 후유증으로 시달릴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다. 과거에 한 번 “자라보고 놀란 것” 때문에 세월이 지나서 “솥 뚜겅을 봤을 뿐인데도 여전히 놀라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기억과 감정의 연속성 때문이다. 지금의 예는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과정에서 겪는 문제이다. 그것을 현생(present life)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영혼의 공간을 전제로 한다면 현생이란 것도 전체 영속적이고도 불멸적인 영혼의 과정에서는 한 부분에 불과할 것이 아닐까?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자신의 삶의 과정을 돌아보면서 유치원 시절, 초등학교 시절, 군대시절, 신혼시절, 입사초년병 시절,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절과 같은 그런 특정한 시간이나 기간을 전체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삶의 특정한 시점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그 후의 삶의 과정에서 영향을 미치듯이 특정 전생에서 경험했던 일들이나 사건이 현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전생의 트라우마가 현재 삶으로 영향을 미쳐서 현생에서 원인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경우에 치료를 위한 갖가지 노력을 해보지만 효과를 못보게 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곧 전생치료(past-life therapy)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평소에 늘 섭취하는 여러 가지 음식이나 식품의 독성, 영양의 문제, 생활공간이나 자연 환경의 오염 문제 등으로 인해서 우리의 몸도 다양한 형태로 오염이 되기에 인체는 병이 들 수 있다. 이것은 몸의 차원이며 몸의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공간에서도 오염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영혼이 오염되는 대표적인 현상이 곧 빙의(憑依) 현상이다. 빙의(spirit attachment / possession / spirit obsession)란 자신의 영혼이 다른 영혼의 작용으로 인해 침범되고 간섭되는 것을 말한다. 흔히 “귀신씌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빙의란 이른바 “귀신씌임” 현상에 해당한다. 빙의의 경우에 보이지 않는 영적 작용에 의해서 몸이나 마음 공간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 결과로 몸이나 마음의 정상적인 기능이 마비되거나 역기능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곧 몸과 마음의 다양한 증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전통적인 과학적 차원에서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믿지 않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빙의에 의한 여러 가지 장애들이 만연한 현실에서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환자는 고통만 받게 된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빙의치료(Spirit Releasement Therapy)이다. 빙의치료의 영어 원문을 보면 releasement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동사 release에서 파생한 것으로, 곧 (갇히거나 구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풀어 주다”, “석방하다”, “해방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빙의치료”를 영어 단어를 중심으로 풀이하면 곧 “(빙의된) 사람에게 붙어 있는 다른 영혼을 풀어주거나 석방하고 해방시키는 치료”라는 의미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온전한 자신의 영혼을 회복하고 온전한 원래의 자아가 될 수 있게 돕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체질, 심리적 특성, 영혼의 정체성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태어나 성장하면서 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사람이나 매스컴, 또는 교육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고유성이나 정체성과는 다른 메시지, 특히나 부정적이고 유해한 메시지, 심지어는 ‘교육’의 이름으로 ‘비교육적’인 메시지를 듣기도 한다. 그 결과로 우리 개인의 본성이나 정체성은 오염되고 원래의 정체성이 왜곡되거나 정체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마치 그것이 원래의 것인 줄 착각하는 현상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영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차원에서의 빙의치료란 원래의 영혼으로 돌아가게 하고 원래의 영적 정체성을 찾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에 가장 인본주의적인 치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봤을 때 인간의 삶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또는 더욱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치료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 차원로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그래서 의학이 다루는 신체치료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위의 그림과 설명에서 봤듯이 전체 공간에 있어서 몸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을 뛰어넘는 마음을 다루는 심리치료도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논리로 그것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의 공간을 뛰어넘는 영혼의 공간이 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을 다루는 전생치료와 빙의치료도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과 같이 살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한 가지 추가적인 공간이 더 있음을 안다. 그것은 곧 그림의 가장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빛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모든 생명과 물질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 공간으로부터 모든 존재는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어떻게 이 공간을 인식하고 그곳에서 오는 에너지나 메시지를 받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했을 때 그것이 곧 ‘깨달음’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 삶의 가장 궁극은 인간성의 확장이며, 그 확장의 끝은 바로 이 빛의 공간을 인식하고 이 빛의 공간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궁극의 지향점은 바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삶에서 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흔히 수행자나 수도자란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수행이나 수도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곧 깨달은 사람, 즉 각자(覺者)라고 부르고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하는데 그의 대표적인 분이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도 스스로 깨달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온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러한 사실을 목숨을 걸고 전파했기 때문이다.
결국 삶의 궁극목표는 곧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깨달음은 모든 몸, 마음, 영혼의 문제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곧 치료의 궁극목표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몸의 차원에서는 깨달음이 있는 빛까지의 거리가 전체 차원 중에서 가장 멀다. 오히려 영혼의 공간이 빛의 공간과 가장 가깝다. 그래서 영혼의 차원에서 다루는 전생치료와 빙의치료는 곧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생치료와 빙의치료를 통하여 우리는 궁극의 깨달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궁극의 깨달음이 너무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게 된다면 좋은 것이다. 그 작은 깨달음이 결국엔 궁극의 깨달음으로 연결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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