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문 칼럼

신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

설기문 2009. 5. 27. 13:15

신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

                                                                               - 장영희와 밀턴 에릭슨

 

장영희,

최근에 암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전 서강대 교수의 이름이다.

영문학자, 번역가, 수필가이기도 했던 그녀는 여러가지 면에서 에릭슨최면의 창시자

밀턴 에릭슨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수 년전, 한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그녀의 주옥 같은 영시번역과 해설을 읽으면서

그녀를 처음으로 알았고 그녀의 글에 심취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한동안 읽었던 그녀의 연재물이 그녀의 암투병 소식과 함께 중단된다는

안내글을 보면서 안타깝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2001년부터 9년간 3차례나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그녀는 2001년에 유방암에 걸렸으나 회복되었지만 2004년에는 척추로 암이 옮아왔단다.

그리고 그 암은 다시 간으로 전이되어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는 가운데 결국 생을 마감하였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

 

이 말은 요즘 장영희의 죽음 소식을 전하는 언론에서 즐겨 인용되는 그녀의 명언이다.

그녀는 3년간 일간지에 연재하던 칼럼 '장영희의 문학의 숲' 중단을 알리는 마지막 글을

시작하면서 “신(神)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올 가을 나는 계획이 참 많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

그랬던 그녀가 다시 간암으로 결국은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세상에는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생 중에도 그녀 이상으로 심한 소아마비 증상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변호사로 또 국회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친구가 있다.

그 외에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녀 이상으로 심한 신체적 장애를 겪으면서

더 큰 성공을 거둔 이들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녀는 에릭슨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에릭슨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물론 그녀는 심리치료자도 아니고 상담자도 아닌 그녀는 영문학자이면서 문학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이나 그녀의 글들은 많은 이들에게 치유적 효과를 준 것 같다.

어떤 이는 “그녀가 생산하는 희망의 바이러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역경에 부딪히고

삶에 지친 동시대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었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일산 국립암센터의 환자들을 위한 서가에 장 교수가 쓴 책들이 그렇게 많이 비치돼 있고 손때가 묻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의 글이 주는 치유의 힘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장영희 효과'라고도 한단다. 

이만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녀를 통해서 에릭슨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두 말 할 필요없이 에릭슨은 세계 최고의 치유자이다.

그는 입으로 나오는 말로써 사람들을 치유했다면 장교수는 글로써 치유했던 것 같다.

물론 두 사람 다 온 몸으로 삶의 모범을 보였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이라는 치유적 힘을 발휘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에릭슨 또한 장교수 이상으로 심한 장애와 고통을 겪으면서 그녀 보다는 20년 이상을 더 살면서

그 시간만큼이나 더한 고통을 겪다가 우리 나이로 80세쯤에 생을 마감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소아마비라는 보통사람들이 경험하기 힘든 질병을 앓았다.

그녀는 태어난 지 1년만에 앓은 척수성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1급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앉지 못해 누워만 있던 소아마비 1등급 장애우였다.

그래서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마 등에 업혀 학교에 갔고,

엄마는 그를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 번씩 다시 학교에 갔다.

그 후에도 평생을 목발에 의지한 삶이었다.

 

 에릭슨 또한 17세와 51세때 일생에 두 번이나 소아마비가 발작하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한 에릭슨은 네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했고 17세 소아마비가 처음으로 발작했을 때는,

의사들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았으나 

온 몸이 마비되어 1년여의 기간동안 식물인간처럼 침대에서만 누워서 생활했다.

 

장영희 교수는 메타포와 관점바꾸기(refraiming)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녀의 저서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학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에는, 한 남자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이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

그리고 그녀는 이어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말할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이었고 불행을 긍정적으로 관점바꾸기 하였다.

 

그녀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저를 두고 '불운을 딛고 일어선 장영희', '희망의 상징' 이렇게 표현하는 게 굉장히 싫습니다.

저는 절대로 불운하지 않았어요. 완전히 반대입니다.

훌륭한 가족 사이에서 태어 났구요. 신체장애란 단지 겉으로 보인다는 것일 뿐이에요.

수십억 인구 모두에게 물어보세요.

사랑을 못 받는다든지 인간관계 형성에 문제가 있다든지 누구 하나 장애가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그건 더 슬픈 장애거든요. 희망이라는 것은 장영희만 가지는 특별한 힘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인 힘이에요."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신의 뜻으로 여기며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 태도는

살면서 불운을 많이 겪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세일 것이다.

 

그러한 모습은  에릭슨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보여지는 삶의 태도이다.

에릭슨은 어릴 때 늦게 말을 배웠고 난독증으로 힘들어 하였다. 그리고 색맹과 난청의 문제도 가졌다.

그런 가운데 17세때 소아마비 발작으로 온 몸이 마비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힘들게 재활훈련을 하면서 학교 공부를 하였다.

이처럼 그는 평생을 함께 한 장애와

특히 노년에 겪은 또 다른 소아마비로 인한 신체 마비증상과 그에 따른 통증을 견뎌나갔다.

그러한 그가 다른 환자를 치료하는 상황에서 “고통은 좋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고통받는 환자에게 관점바꾸기를 해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입니다.”

 

장영희 교수는 어느날 건강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저는 극적인 병만 걸려요. 소아마비나 암이라든지….

나머지 소화불량이라든가, 편두통 이런 잔병은 없어요. 대단한 병, 그러니까 영원히 신체장애가 된다든지…."

라면서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수 조영남과 친분이 있었던지, 어느해 조영남이 장 교수 생일잔치를 열어주자  

"둘이 결혼하는 거냐" 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이때 장 교수는 한 마디로 주변을 잠잠하게 했다. "난 처년데 아깝잖아!"

 

이에 비해서 에릭슨은 결혼을 두 번 하였으며 두 명의 부인에게서 난  자녀가 8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치료를 할 때나 강의를 할 때, 그리고 글에서 특히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물론 두 사람의 전공이 다르다는 점과 기타 여러 가지 면들에서 시시콜콜한 차이가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이라는 점과 치유적인 차원에서 두 사람을 생각할 때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어느날 문득, 불행하다고 생각되거든, 짜증나거나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되거든

장영희 교수를 생각하고 에릭슨을 생각해보자.

그 분들은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사람이다.

 

이 순간에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서 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불편함은 물론이고 의식을 전혀 하지 않고 편하게 숨을 쉬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이 순간에도 이런 저런 문제로 인해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이 순간에 무릎이 아프거나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지를 못하는 사람들에 비한다면

어디든 달려가고 지하철 계단을 마음껏 오르내릴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신체적으로 행복한 사람인가?

 

신체적 행복과 더불어 심리적 행복 역시 그들은 남들이 고통이라 여기는 환경을 통해

그 안에서 행복과 성공, 그리고 성취를 이루어간 것이다.

그들의 삶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