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문 칼럼

에릭슨최면 관련 저서와 역서의 원고를 끝내고..

설기문 2009. 4. 28. 12:05

최근에 나는 두 권의 원고를 탈고하여 출판사로 넘겼다.

그래서 너무 기분이 좋다.

 

한 권은 '에릭슨최면과 심리치료'라는 저서이며

다른 한 권은 '최면상담: 밀턴 에릭슨의 최면치료와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상담의 통합'이라는 역서이다.

특히 뒤의 책은 미국의 Gunnison(2003)의 저서 'Hypnocounseling: An Eclectic Bridge Between Milton Erickson and Carl Rogers'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권의 책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에릭슨최면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내가 에릭슨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그 에릭슨을 통해서 아주 큰 배움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인간으로서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그는 학자로서 성공했다.

그는 임상가로서 누구보다도 탁월한 치료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훌륭한 제자들을 두었다.

그는 결코 자신이나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독선적이지 않았다.

그는 열려있는 사람이었고 환자/내담자를 위해서 자신을 던진 사람이었다.

그는 정열적인 사람이었고 엄청난 역경 앞에서도 쉼없이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였으며 자식들을 잘 키웠다.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자 하였다.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겸손하였다. 

 

내가 그동안 에릭슨을 공부하면서 느끼고 알았던 그의 면모의 부분들이다.

 

몇년에 걸쳐서 에릭슨에 관한 책을 쓰거나 번역하면서 큰 일을 마무리한 기분이다.

특히 거니슨의 최면상담이라는 책은 아주 의미깊은 책이다.

2007년 연말에 나는 그 원서를 가지고 우리 아카데미에서 원서강독을 열었었다.

원래는 길게 할 작정이었지만 몇달간 지속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사정이 생겨서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이 못내 아쉬웠다.

내가 10여년 전에 상담심리학 교수로서 학계에서는 생소한 최면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거니슨의 최면상담에 관한 논문이나 다른 미국 학자들이 쓴

최면상담 관련 논문들을 접하였다.

이때 나는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최면을 치료라는 차원에서 '최면치료'라는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생각했었는데

최면상담이라는 개념과 가능성이 이미 미국 학계에서 제시되었었고

그 차원에서 이미 임상실제에 적용되고 있었기때문이었다.

 

물론 나 또한 최면을 공부하는 동안에 상담심리학자로서 

최면을 최면치료가 아닌 '최면상담'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보급하고자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미 미국 학계에서 그러나 나의 생각이 이미 구체화되거나

실제로 적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을 때는 무척이나 반가웠었다.

 

그리고 2007년 가을 쯤에 거니슨의 저서를 발견하고 곧 바로 출판사와 번역계약을 맺었다.

여러가지로 바쁜 일정 속에서 생각보다 작업이 많이 늦게 진척이 된 점은 무척이나 아쉽지만

그래도 계약기간내에 번역작업이 마무리 되어 이제 수 개월 이내에 번역책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나 개인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최면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상담학의 발전에 있어서 무척이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에릭슨최면은 공부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다.

몇년전부터 최면치료 수업중에 에릭슨최면을 부분적으로 강의하다가

본격적으로 에릭슨최면 과정을 개설하여 가르치게 된 것은 너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에릭슨최면 과정을 강의하는 가운데 교재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물론 세미나용 매뉴얼은 있었지만

제대로 소개하는 서적의 필요성이 크게 제기되었다. 학문적으로도 그러한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에릭슨최면 세미나를 진행하는 짬짬이 책을 저술하기 시작하여 마무리한 것이

곧 이번의 '에릭슨최면과 심리치료'라는 저서이다.

 

아무쪼록 이번의 책들이 최면을 사랑하는 분들에게와 인간변화에 관심있는 모든 분들에게

좋은 도움되는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